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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이바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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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는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스페인 내전 시기 공화파를 지지하며 "라 파시오나리아(정열의 꽃)"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후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공산당 기관지 편집자로 일했으며, 반파시스트 여성 단체를 설립하는 등 정치 활동을 펼쳤다. 내전 중에는 공화파를 위한 선전 활동을 주도했고, 내전 패배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기여했다. 1977년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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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이바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8년의 돌로레스 이바루리
1978년의 돌로레스 이바루리
본명이시도라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
별칭라 파시오나리아 (La Pasionaria, 열정의 꽃)
출생1895년 12월 9일
출생지스페인 비스카야도 가야르타
사망1989년 11월 12일
사망지스페인 마드리드
안장지마드리드 시민 묘지
국적스페인
배우자(1916년 결혼, 1933년 이혼)
자녀6명
경력
소속 정당스페인 공산당 (Partido Comunista Español)
의회 의원스페인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77년 7월 13일
임기 종료1979년 1월 2일
선거구아스투리아스
의회 의원스페인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36년 2월 26일
임기 종료1939년 2월 2일
선거구아스투리아스
직책스페인 공산당 총서기
임기 시작1942년 3월
임기 종료1960년 7월 3일
이전호세 디아스
이후산티아고 카리요

2. 유년 시절과 초기 정치 활동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1895년 바스크 출신 광부 아버지와 카스티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 갈라르타에서 성장했으며, 15세에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재봉사, 하녀, 웨이트리스 등으로 일했다.[2][3]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중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청년단 창립자인 훌리안 루이스 가비냐를 만나 1915년 결혼했다.[4] 1917년 총파업에 참여했으며, 남편이 투옥된 동안 카를 마르크스 등의 저서를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5] 1918년 광부 신문 ''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글을 기고하며 '파시오나리아'(Pasionaria)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다.[6][7]

1920년 새로 창립된 스페인 공산당(PCE)에 가입하여[8] 바스크 공산당 지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0년간의 풀뿌리 운동을 거쳐 1930년 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9] 이 시기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네 명의 딸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10]

2. 1. 출생과 성장 배경

글래스고에 세워진 라 파시오나리아 동상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1895년 비스카야 현 갈라르타(현재 아반토 이 시에르바나의 지구 중 하나)에서 열한 명의 형제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2] 출생 당시 이름은 이시도라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였으나, 후에 정식으로 이시도라라는 이름을 제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카를리스타 이념을 가진 바스크인 광부였고, 어머니는 카스티야인이었다.[1] 그녀가 성장한 갈라르타는 대규모 갈철광 광산 옆에 위치한 지역이었다.[1]

경건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자란 이바루리는 한때 수녀가 되려 했을 정도로 종교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15세에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2년간 교원 양성 과정을 준비했지만,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2] 그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누가 나에게 여행비, 책 구입비, 식비,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었겠는가?(중략) 우리 가족이 걸어온 역사는, 여성은 사용인으로 남을 섬기거나, 결혼해서 광산 노동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학업을 포기한 후, 그녀는 재봉사와 하녀로 일했다.[2] 이후 소모로스트로 지역의 중심지인 아르볼레다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되었는데,[3] 그곳에서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청년단의 창립자인 훌리안 루이스 가비냐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15년 말 결혼했고,[4] 1917년 총파업에 함께 참여했다. 이 일로 남편 루이스는 다시 투옥되었고, 이바루리는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노동자 센터의 도서관에서 카를 마르크스 등의 저서를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5]

1918년, 이바루리는 광부 신문 ''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를 기고했다. 성주간에 발표된 이 글은 종교위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대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글의 주제와 발표 시기를 고려하여 그녀는 '파시오나리아'(Pasionaria, 수난의 여인)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1920년, 이바루리와 그녀가 속했던 노동자 센터는 새로 창립된 스페인 공산당(PCE)에 가입했다.[8] 그녀는 바스크 공산당 지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0년간의 풀뿌리 운동을 거쳐 1930년에는 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9]

이 시기 이바루리는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다섯 딸 중 네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는 "남편이 과일 상자로 작은 관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10] 유일한 아들 루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2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남은 자녀는 딸 아마야 루이스 이바루리뿐이었으며, 그녀는 스탈린의 양자 아르툠 세르게예프와 결혼했다. 아마야는 어머니보다 오래 살았고, 2008년에는 마드리드의 노동자 계급 지역인 시우다드 리네알에 거주했으며,[11][12] 2018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2. 2. 교육과 초기 경력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1895년 비스카이 지방 갈라르타(현재 아반토 이 시에르바나의 일부)에서 아홉 자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2] 출생 당시 이름은 이시도라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였으나, 후에 정식으로 '이시도라'라는 이름을 제외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카를리스타 이념을 가진 바스크인 광부였고, 어머니는 카스티야 출신이었다.[1] 그녀가 성장한 갈라르타는 큰 사문석 광산(혹은 갈철광 광산)과 인접해 있었다.[1] 경건한 가톨릭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라 한때 수녀가 되기를 생각할 정도로 종교적이었다.

1910년, 15세의 이바루리는 교원사범학교 입학 준비 과정에 합격했으나[2]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녀는 "누가 나에게 여행비, 책 구입비, 식비,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었겠는가?(중략) 우리 가족이 걸어온 역사는, 여성은 사용인으로 남을 섬기거나, 결혼해서 광산 노동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후 재봉사와 하녀로 일했으며,[2] 소모로스트로 지역의 주요 도시인 아르볼레다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3]

아르볼레다에서 그녀는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청년단의 창립자인 훌리안 루이스 가비냐를 만났다. 그들은 1915년 말 결혼했고,[4] 1917년 총파업에 함께 참여했다. 이 파업으로 남편 루이스가 투옥되자, 이바루리는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노동자 센터의 도서관에서 카를 마르크스 등의 저서를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5]

1918년, 이바루리는 광부 신문 ''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를 기고했다. 성주간에 발표된 이 글은 종교위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현실을 대비시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수난의 여인)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1920년, 이바루리와 그녀가 속한 노동자 센터는 새로 창립된 스페인 공산당(PCE)에 가입했다.[8] 그녀는 바스크 공산당 지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0년간의 풀뿌리 운동을 거쳐 1930년에는 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9]

이 시기에 이바루리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다섯 딸 중 네 명은 매우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녀는 "남편이 과일 상자로 작은 관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10]

2. 3. 사회주의 운동 참여

소모로스트로에서 노동조합 운동가이자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청년단의 창립자인 훌리안 루이스 가비냐를 만나 1915년 말 결혼했다.[4] 이바루리는 사회주의자였던 남편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읽으며 보수주의와 가톨릭 교육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노동자 계급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131][5]

1917년 스페인 총파업에 남편과 함께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남편 루이스는 투옥되기도 했다.[4][5] 이바루리는 소모로스트로 사회주의 노동자 센터 도서관에서 카를 마르크스 등의 저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5] 1918년, 광부 신문 El Minero Vizcaínoes("비스카야의 광부"라는 뜻)에 종교위선을 비판하는 첫 기사를 기고하며 La Pasionariaes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다. 이 기사는 성주간에 발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대비를 이루었다.[6][7][132][133] 1919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의 승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134]

1919년 남편과 함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의 친공산주의 분파에 참여했으며, 1920년 스페인 공산주의노동자당(PCOE) 창설에 참여하여 비스카야 지방 위원회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21년, 스페인 공산주의노동자당이 스페인 공산당(PCE)으로 통합되자 이바루리도 이에 합류했다.[8] 10년간의 풀뿌리 운동을 거쳐 1930년 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9]

1931년, 당 기관지 Mundo Obreroes의 편집자로 일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1932년 3월 세비야에서 열린 제4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135] 같은 해 1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ECCI) 제13차 총회에 스페인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는 전쟁과 파시즘의 위협을 논의하는 자리였으며, 이바루리는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36][137] 1933년에는 새로 결성된 반파시스트 여성 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1934년 말, 아스투리아스에서 일어난 광부 총파업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자, 이바루리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 작전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파업으로 부모를 잃거나 체포되어 굶주리던 100명 이상의 아이들을 마드리드의 위탁 가정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이바루리는 체포되었다.[138] 옥중에 있던 1935년 봄, 이바루리는 남은 두 자녀(루벤, 아마야)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소비에트 연방으로 보냈다.

3. 스페인 제2공화국과 내전 시기 활동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이후,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스페인 공산당(PCE)의 주요 인물로 성장하며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으나, 반파시즘 운동과 여성 운동을 이끌고 코민테른 활동에도 참여하며 입지를 다졌다.[14][15][16][17] 1936년에는 인민 전선의 일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3]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바루리는 '라 파시오나리아'로서 공화파 진영의 투쟁을 독려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녀의 열정적인 연설, 특히 "¡No pasarán!"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139]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27]는 널리 알려지며 저항의 구호가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그녀는 공화국 정부와 PCE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과 아나키스트 등 다른 좌파 세력과의 갈등 및 탄압에 연루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34][35][38] 이 시기 이바루리의 구체적인 활동과 내전 중 역할에 대해서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마드리드 이주와 정치 활동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이바루리는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스페인 공산당(PCE)의 기관지인 Mundo Obrero|문도 오브레로es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녀는 같은 해 9월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수감된 상황에서, 이바루리는 다른 정치범들을 설득하여 석방을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1932년 3월 두 번째로 체포된 후에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면회실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감옥 마당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을 거부하도록 독려했다.[14] 그녀는 감옥에서 두 편의 글을 썼는데, 하나는 PCE의 또 다른 간행물인 Frente Rojo|프렌테 로호es에, 다른 하나는 Mundo Obreroes에 실렸다. 1932년 3월 17일, 세비야에서 열린 제4차 당 대회를 통해 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5]

1933년, 이바루리는 여성 단체인 Mujeres Antifascistas|무헤레스 안티파시스타스es를 설립하여 반파시즘과 전쟁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16] 같은 해 4월 18일, 소련의 천문학자 그리고리 네우민은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 1933 HA에 그녀의 이름을 따 "돌로레스"라고 명명했다. 11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제13차 총회에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파시즘의 위험과 전쟁의 위협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17] 이바루리는 모스크바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나에게, 영혼의 눈으로 그것을 본 나에게,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도시였다. 사회주의의 건설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여러 세대의 노예, 추방자, 농노, 프롤레타리아의 지상에서의 자유에 대한 꿈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인류의 공산주의를 향한 행진을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18] 그녀는 해가 바뀐 뒤에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934년, 이바루리는 파리에서 열린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제1차 세계 회의(Rassemblement Mondial des femmes contre la guerre et le fascisme|라스망블레망 몽디알 데 팜 콩트르 라 게르 에 르 파시슴프랑스어)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국제 여성 평화 자유 연맹 프랑스 지부 회장인 가브리엘 뒤셴이 주재했지만, 이 조직 자체는 단명한 프랑스 인민 전선의 산하 기구였다.[19] Rassemblement프랑스어과 인민 전선 모두 1939년에 해체되었다.

1934년 말, 이바루리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지역으로 위험한 구조 임무를 떠났다. 1934년 10월 혁명 실패 후 투옥된 부모를 둔 굶주린 어린이 100명 이상을 마드리드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혁명은 공화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바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지만, 사마 데 랑그레오와 오비에도의 감옥에 잠시 구금되었다.[20] 자녀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1935년 봄에 아이들을 소련으로 보냈다.

이바루리(오른쪽)와 프랑스 활동가 베르나데트 카타네오, 1936년


1935년, 그녀는 스페인 국경을 비밀리에 넘어 7월 25일부터 8월 2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세계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파시스트에 대항하기 위해 "진보적인 부르주아" 정부와의 동맹을 제안하는 기조 연설을 했다.[21] 이러한 인민 전선 전략은 1936년 6월 프랑스에서 인민 전선 정부가 집권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바루리는 디미트로프의 연설을 PCE의 오랜 입장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열정으로 가득 차서, 우리나라의 다양한 노동자 및 민주주의 조직 간의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결심"하고 귀국했다.[18] 같은 회의에서 그녀는 ECCI의 부의원으로 선출되어, PCE 사무총장 호세 디아스에 이어 스페인 공산당 내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22]

1936년, 이바루리는 마드리드에서 체포 과정 중 경찰관들에게 심한 학대를 당한 후 네 번째로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 그녀는 2월 16일 총선을 앞두고 PCE를 위해 아스투리아스로 가서 선거 운동을 벌였다. 이 선거에서는 총 323,310표가 행사되었으나, 유권자 한 명이 최대 13명의 후보에게 동시에 투표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PCE는 170,497표를 얻어 돌로레스 이바루리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23] 인민 전선의 선거 공약 중 하나는 정치범 석방이었고, 당선된 이바루리는 즉시 오비에도로 가서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활동에 나섰다.

> 선거에서 인민 전선의 승리가 알려지자마자, 나는 이미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다음날 아침 오비에도 감옥에 나타나 1934년 10월 혁명 이후 투옥된 아스투리아스 죄수들에게 진정한 범죄자처럼 행동했던 감옥 소장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서 나는 행정관을 만나 "열쇠를 주세요. 죄수들은 오늘 석방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나는 "나는 공화국 의회 의원이며, 죄수를 석방하기 위해 즉시 열쇠를 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열쇠를 넘겨주었고, 나는 그것이 나의 활동가로서 가장 감동적인 날이었다고 확신한다. 감방을 열고 "동지들, 모두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나는 의회가 열리거나 석방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우리는 1934년 혁명의 죄수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선거를 치렀고, 승리했다. 오늘 죄수들이 자유의 몸이 된다"고 생각했다.[24][25]

스페인 내전 발발 몇 달 전, 그녀는 아스투리아스의 카다비오 광산 파업에 참여했으며, 마드리드 교외에서 쫓겨난 가난한 세입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에도 함께했다.[9] 이 무렵,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이바루리, 그리고 친구들은 마드리드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바루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르카는 그녀에게 "돌로레스, 당신은 슬픔과 고통의 여자입니다... 당신을 위해 시를 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26] 그러나 로르카는 그라나다로 돌아간 후, 시를 완성하기 전에 국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3. 2. 스페인 내전 발발과 선전 활동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바루리는 '라 파시오나리아'로서 열정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그녀는 공화국 방어에 나선 이들을 독려하는 연설로 유명해졌으며, 이는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녀의 연설 중 일부는 마드리드에서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대표적인 연설 제목과 날짜는 다음과 같다.[27]

  • "위험! 무장하라!" (7월 19일)
  • "우리 전사들에게 아무것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7월 24일)
  • "규율, 침착함, 경계!" (7월 29일)
  • "외국 간섭자들의 손을 억제하라!" (7월 30일)
  • "파시즘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No pasarán!)" (8월 24일)
  • "무릎 꿇고 사는 것보다 꼿꼿이 서서 죽는 것이 낫다!" (9월 3일)
  • "전선에 있는 우리 민병대 여성들에게 경례를 보낸다" (9월 4일)
  • "우리의 전투 함성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9월 15일)


이 연설들을 통해 당시 마드리드의 상황, 즉 다수가 공화국 편이었으나 통제되지 않은 세력의 활동과 국민주의자 진영의 효과적인 선전, 그리고 외국 원조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이바루리의 초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936년 10월 2일, 그녀는 소련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토로하며 "아들아, 지금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 얼마나 잔혹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밤낮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우리의 가장 훌륭하고 용감한 동지들이 죽어갔다."라고 적었다.[28] 그녀는 최전선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밝히며, 무기 부족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승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37년 전쟁이 격화되면서 국민주의파가 비무장 도시를 폭격하자, 당시 의회 부의장이었던 이바루리는 "진보적 부르주아" 정부에 상응하는 보복을 촉구했다. 그러나 지식인 출신인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헌법이나 국제법 위반을 우려했고, 사회주의자인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는 스페인 공산당(PCE)과의 협력을 꺼렸다. 이바루리는 당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자유와 진보를 사랑하는 모든 나라의 남녀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우리의 호소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남아있고, 우리의 항의가 무시되며, 우리의 인간적인 행동이, 이 모든 것이 약함의 징후로 간주된다면, 그러면 적은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분노를 터뜨리고 그의 은신처에서 그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9][139]


수도 마드리드를 방어하던 세기스문도 카사도 대령이 국민군에게 항복하려 하자, 이바루리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그들을 용납하지 마라!'''"라고 외쳤고, 이는 포위전 동안 공화파의 상징적인 구호가 되었다.

1937년 2월 24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 자원병의 스페인 파견을 금지했지만,[30][140] 레닌 훈장 수훈자이자 NKVD(소련 비밀경찰) 요원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는 계속 스페인에 머물렀다. 오를로프와 NKVD는 1937년 5월 3일부터 8일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인민 전선과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인 5월의 날들을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31][141] 이 충돌로 약 1,000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32][142][33][143] POUM이 와해되면서 스탈린은 망명 중이던 레프 트로츠키가 스페인에서 활동할 기반을 제거했다. 오를로프는 대숙청(1936–1938) 시기와 유사한 공포 정치,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바르셀로나 5월 사건 이후, 이바루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파시스트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연설을 통해 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할 필요성을 지적할 때, 우리는 매우 이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즉, 특정 조직의 대열과 특정 정당의 특정 서클에서 이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이 목소리는 이 반혁명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취해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오랫동안 파시즘의 대리인, 독일 게슈타포의 대리인으로 변모했습니다. 우리는 5월 쿠데타 기간에 카탈루냐에서 이를 현장에서 보았고, 다른 여러 곳에서 발생한 소란 속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간첩 혐의로 체포된 POUM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될 때 모든 사람이 이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파시즘의 손이 우리 국내 전선을 사기를 떨어뜨리고 공화국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모든 시도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를 확고한 손으로 뿌리 뽑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주의는 더 이상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반혁명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트로츠키주의는 유독한 잡초를 뿌리 뽑는 것처럼 우리 당의 프롤레타리아 대열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야생 동물처럼 뿌리 뽑아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병사들이 공격을 감행하고 싶을 때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후방에서 일으킨 불법 행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자들에게는 한 번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선에 있는 우리 병사들이 등을 찔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습니다.[34][144]



이바루리는 5월 사건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명령과 아돌프 히틀러와의 협력 하에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아나키스트-트로츠키주의자"의 시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들이 열차 운행을 중단시키고 통신망을 마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며, 카탈루냐 정부의 전화국 장악 및 무장 해제 명령을 그 증거로 제시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당원들에게는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신빙성을 잃었다.

공산당은 이 사건을 중앙집권적 군사 지휘에 대한 불만과 권력 장악 욕심에서 비롯된 아나키스트들의 "쿠데타" 시도라고 주장했다. 반면 아나키스트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스탈린주의 NKVD와 연계된 공산당이 혁명 활동을 장악하려는 권위주의적 시도라고 비판하며, 사건 이전의 평등주의적 분위기와 공산당의 경찰 국가적 행태를 대조했다.

이바루리, 호세 디아스 라모스, 그리고 PCE 지도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37년 6월,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진 인민 전선 정부는 아라곤 전선에 주둔한 POUM과 아나키스트 통제 하의 부대를 해산시켰다. 7월 29일에는 우에스카 전선의 POUM 제29사단이 무장 해제되었고, 8월 4일에는 아라곤의 아나키스트-신디칼리스트 평의회가 해체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새로운 경찰 책임자 리카르도 부릴로 스톨레가 오를로프의 지시에 따라 POUM 지도자 안드레우 닌을 체포했다. 닌은 발렌시아를 거쳐 마드리드 근교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끌려가 1937년 6월 20일 오를로프의 요원들에게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35]

남아있는 POUM 지도부는 1938년 10월 11일 바르셀로나에서 재판을 받았다.[36][145][37][146] 이 재판과 관련하여 이바루리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백 명의 유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석방하는 것이 낫다는 격언이 있다면, 한 민족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한 명의 유죄자를 석방하는 것보다 백 명의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판결하는 것이 낫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38][147]

1938년 4월 30일, 스탈린은 프랑스, 영국과의 군사 동맹을 제안하며 사실상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축소할 가능성을 내비쳤다.[39]

1972년, 루마니아를 방문한 이바루리를 맞이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3. 3. 내전 중 논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바루리는 공화파 진영의 사기를 북돋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열정적인 연설을 했으며, 특히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27]라는 외침과 함께 마드리드 방어의 상징적인 구호가 된 "¡No pasarán!"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은 널리 알려졌다.[139] 그녀의 연설들은 공화국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상과 어려움에 대한 그녀의 깊은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1936년 10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지금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 얼마나 잔혹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며, "매일, 밤낮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우리의 가장 훌륭하고 용감한 동지들이 죽어갔다"고 토로했다.[28]

1937년, 전쟁이 격화되면서 국민주의자 진영이 비무장 도시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자, 당시 공화국 의회 부의장이었던 이바루리는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정부에 촉구했다. 그녀는 이러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해 "진보적 부르주아" 정부가 단호하게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헌법이나 국제법 위반을 우려했고, 사회주의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는 스페인 공산당(PCE)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이바루리는 연설을 통해 필요하다면 극단적인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 자유와 진보를 사랑하는 모든 나라의 남녀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우리의 호소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남아있고, 우리의 항의가 무시되며, 우리의 인간적인 행동이, 이 모든 것이 약함의 징후로 간주된다면, 그러면 적은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분노를 터뜨리고 그의 은신처에서 그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9][139]

한편, 스탈린은 1937년 2월 소련 자원병의 스페인 파견을 금지했지만,[30][140] 비밀경찰 NKVD 요원인 알렉산더 오를로프는 계속 스페인에 남아 활동했다. 오를로프와 NKVD는 1937년 5월 3일부터 8일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인민 전선트로츠키주의 성향의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 이른바 '5월의 날들'을 조작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1][141] 이 충돌로 약 1,000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32][33][142][143] 이 사건을 계기로 스탈린은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가 스페인에서 활동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5월의 날들' 이후, 이바루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파시스트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녀는 이들이 프랑코의 지령과 히틀러와의 협력 하에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며, 5월의 폭력 사태는 이러한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할 필요성을 지적할 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오랫동안 파시즘의 대리인, 독일 게슈타포의 대리인으로 변모했습니다. 우리는 5월 쿠데타 기간에 카탈루냐에서 이를 현장에서 보았고... 간첩 혐의로 체포된 POUM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될 때 모든 사람이 이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를 확고한 손으로 뿌리 뽑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주의는 더 이상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반혁명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

> 트로츠키주의는 유독한 잡초를 뿌리 뽑는 것처럼 우리 당의 프롤레타리아 대열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야생 동물처럼 뿌리 뽑아 처리해야 합니다.[34][14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바루리와 호세 디아스 등 스페인 공산당 지도부는 POUM과 아나키스트 세력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1937년 6월,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진 인민 전선 정부는 아라곤 전선 등에서 POUM과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켰다. 전국 노동 연맹(CNT)의 전 서기장이자 POUM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스 닌은 스페인 공산당과 카탈루냐 통일사회당의 사주를 받은 소련의 스파이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을 받은 끝에 살해되었다.[35] 남은 POUM 지도부의 재판은 1938년 10월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되었다.[36][37][145][146] 이바루리는 이 재판과 관련하여 발렌시아의 집회에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백 명의 유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석방하는 것이 낫다는 격언이 있다면, 한 민족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한 명의 유죄자를 석방하는 것보다 백 명의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판결하는 것이 낫다"고 발언하며 탄압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8][147]

한편, 국제 정세는 공화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938년 4월, 스탈린은 프랑스, 영국과의 군사 동맹을 모색하면서 사실상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39]

4. 망명과 귀국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패배한 후, 1939년 3월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프랑스령 알제리오랑으로 피신했으나,[40] 곧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가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정착한 그녀는 이후 38년 동안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소련 망명 기간 동안 이바루리는 PCE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일했으며, 1942년 호세 디아스가 사망한 후에는 PCE 사무총장직을 계승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Radio España Independientees라는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며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독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힘썼다.[43] 이 시기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아들 루벤 루이즈 이바루리를 잃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도 했다.[44][45][46] 1960년에는 사무총장직을 산티아고 카리요에게 넘기고 명예 회장직을 맡았다.[53] 망명 기간 동안 그녀는 레닌 평화상[62]레닌 훈장[66]을 받는 등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1975년 11월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이바루리의 귀국이 추진되었다. 1977년 아토차 학살과 같은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PCE는 합법화되었고, 이바루리는 1977년 총선 후보로 지명되었다.[74] 마침내 1977년 5월 13일, 이바루리는 38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76][77] 그녀의 귀국은 스페인 민주주의 회복 과정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귀국 후 활동과 말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4. 1. 소련 망명 생활

스페인 내전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자, 1939년 3월 6일 이바루리는 알제리오랑으로 피신했다. 당시 오랑은 프랑스령 알제리였다.[40] 프랑스 당국은 그녀를 마르세유행 배에 태웠고, 파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마련했다. 이후 그녀는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PCE 서기장 호세 디아스, 장군 엔리케 리스터, 후안 모데스토 등 다른 망명자들과 합류했으며, 프랑스 수용소에서 탈출한 딸 아마야, 아들 루벤과도 재회했다.

소련 당국은 스페인 망명자들을 환대했다. 이바루리는 디아스와 같은 건물에 아파트를 배정받았고, 전용 운전기사도 제공받았다. 그녀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기도 했으며, 볼쇼이 극장과 로멘 극장 공연 관람을 즐겼고, 독서에 열중했다. 특히 러시아 여성들의 해방을 목격하며 기뻐했다.[41] 그녀는 다른 망명 가족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이바루리는 크렘린 근처 코민테른 본부에서 집행위원회 사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주요 업무는 소련 외부의 공산주의 운동 발전을 지속적으로 평가, 분석하고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는 스페인 상황에 초점을 맞춘 PCE 중앙위원회의 논의와 병행되었다. 스페인 공산당소련 공산당 사이에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전까지 심각한 의견 불일치는 없었으며, PCE는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을 포함한 스탈린의 국내외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했다. 1940년 1월, 그녀는 스탈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지구의 6분의 1 이상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소련의 농업의 풍요로운 발전에 대해 쓰고, 사회주의 산업의 놀라운 성장과 노동자들의 맹렬한 발전을 찬양하고, 강력한 소비에트 공군의 전례 없는 업적과 소비에트 해군의 강력한 증강, 인민의 해방자인 붉은 군대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묘사하고, 형제적 우정의 깨지지 않는 유대로 결합된 여러 국적을 가진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훌륭한 틀을 연구하고, 모든 소비에트 인민의 과학, 예술 및 문화의 진보, 아이들, 여성, 노동자, 농민 및 지식인의 기쁨에 찬 삶, 모든 사람의 지속적인 안전과 미래에 대한 그들의 믿음, 사회주의의 일상 생활과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적인 행동을 아는 것은 스탈린을 보고, 스탈린을 인용하고, 스탈린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42]


이바루리는 프랑코 시대 스페인 시민들을 대상으로 뉴스, 분석, 의견을 방송하는 단파 라디오 방송국 관리를 맡게 되었다. 이 방송국은 공식적으로 Radio España Independientees로 명명되었으나, 스페인 내에서는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라 피레나이카"(La Pirenaicaes)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43] 방송은 1941년 7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 한 달 후에 시작되었다. 초기 방송은 공습이 이어지는 가운데 촛불을 켠 지하실에서 진행되었다.

독일의 침공 이후 많은 스페인 망명자들이 소련군에 자원하여 싸웠다. 이바루리에 따르면 200명 이상이 전투 중 사망했다. 그녀의 아들 루벤 루이즈 이바루리 역시 붉은 군대 중위로 참전하여 1942년 9월 3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전사했다.[44][45][46] 소행성 2423 이바루리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1941년 10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하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는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의 수도 우파로 피난했다. 라디오 에스파냐 인디펜디엔테 방송도 우파에서 계속되었다. 이바루리는 방송의 규모가 커 보이도록 여러 가명을 사용했다. 1942년 3월 19일, 호세 디아스가 트빌리시에서 자살하자, 이바루리는 스탈린과의 협의를 거쳐 PCE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5월 15일,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체하고 각국 공산당에 이론적 독립성을 부여했다.[47] 이바루리는 이 결정에 동의했다. 1945년 2월, 그녀는 테헤란, 바그다드, 카이로를 거쳐 해방된 파리로 가서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후안 네그린과 프랑코에 대항할 공동 전략을 논의하려 했으나, 도착이 늦어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1945년 12월, PCE는 툴루즈에서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었고, 이 회의에서 산티아고 카리요가 당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48] 엔리케 리스터는 그의 저서 ''Así destruyó Carrillo el PCE''에서 망명 기간 동안의 이바루리와 카리요 등 지도부의 행동을 비판했다.

[1939-1945년 사이의 PCE 상황에 대한 검토]는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특히 스페인에 있는 우리 당원들의 압도적 다수의 정치적, 도덕적 행동이 칭찬할 만했던 반면, 망명 중인 지도자들의 행동은 많은 것을 남겨두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많은 더러운 비밀, 많은 비겁한 행동이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돌로레스 이바루리, 카리요, 미제, 안톤, 델리카도는 우리가 말하는 것의 좋은 예이지만 유일한 예는 아니다.[48]


리스터는 또한 1947년에서 1951년 사이 당내 박해가 심화되었으며, 암살이 당 관리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1947-1951년 사이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당 내부의 박해는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오는 동지들의 체포와 마찬가지로 증가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졌듯이, 암살은 당의 억압과 관리에 대한 도구가 되었다... 암살을 결정하는 것은 PCE의 사무국에서 이루어졌다. 암살 대상이 스페인으로 도망가면 그의 존재는 Radio España Independiente의 방송을 통해 스페인 당국에 배신되었다.[48]


심문은 잔혹했다. "카리요와 안톤은 진정한 공포를 가했다. 일부 동지는 심문 과정에서 정신이상의 지경에 이르렀고, 다른 동지는 그들에 대한 비열한 비난으로 자살했다."[48] 리스터는 가브리엘 레온 트리야(1945), 호안 코모레라(1954) 등 여러 당원들이 지도부에 의해 배신당하거나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며, 트리야 제거 결정에는 카리요와 이바루리가 관여했다고 명시했다.[48][49] 또한 갈리시아 지역 지도자 빅토르 가르시아('엘 브라질레뇨')가 1948년 당에 의해 살해된 사건도 언급된다.[50][51][52]

1960년 1월, 프라하에서 열린 PCE 제6차 대회에서 이바루리는 사무총장직을 산티아고 카리요에게 넘기고 명예 회장직을 수락했다.[53] 이후 그녀는 첫 번째 회고록 ''El Único Camino''(유일한 길)을 집필하여 1962년 파리에서 출판했다.[54][55] 이 책은 1966년 영어로도 번역되었다.[56]

망명 기간 동안 이바루리는 여러 국제적 활동에 참여하고 영예를 얻었다. 1961년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명예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57] 1962년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 공산당 대회에 참석했다.[26] 1963년에는 쿠바를 방문하여 쿠바 혁명 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60]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영구 이주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64년에는 국제 레닌 평화상을 수상했고,[62] 1965년에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로부터 레닌 훈장을 받았다.[66] 외국인에게 이 훈장이 수여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67] 같은 해, 그녀는 코민포름유고슬라비아를 추방했던 결정에 대해 티토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하기 위해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했다.[26][65]

이바루리는 스페인 내전 당시 PCE의 관점을 담은 4권짜리 역사서 ''Guerra y revolución en España, 1936–1939''의 편집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이 책은 1966년에서 1971년 사이에 출판되었다.[68]

오랜 기간 모스크바 노선을 따랐던 이바루리였지만, 1968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해서는 PCE의 비판적 입장에 동조했다. 이는 그녀가 엄격한 스탈린주의 노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975년 11월 20일,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했다. 이바루리는 "그에게 땅이 가볍게 쉬게 하소서"라고 짧게 논평했다.[26]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이 시작되자, 이바루리는 귀국을 준비했다. 1977년 아토차 학살 이후인 1977년 2월 16일, 그녀는 모스크바 주재 스페인 당국에 귀국 허가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73] 2월 22일, 아직 불법 상태였던 PCE는 6월 15일로 예정된 총선 후보 명단을 발표했고, 이바루리는 마드리드와 아스투리아스 두 지역구 후보로 지명되었다.[74] 스페인 정부는 4월 9일 PCE를 합법화했지만, 이바루리의 비자 발급은 지연되었다. PCE는 비자 유무와 관계없이 5월 13일 그녀가 귀국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결국 스페인 당국은 5월 12일 비자를 발급했다. 이로써 38년간의 긴 망명 생활이 끝날 준비가 되었다.

4. 2. 스페인 귀국과 민주화 이후 활동

1975년 11월 20일,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했다. 이바루리는 이에 대해 간결하게 "그에게 땅이 가볍게 쉬게 하소서"라고 논평했다.[26]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이바루리의 귀국 가능성이 열렸다.

1977년 1월 24일 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신 파시스트 특공대가 마드리드 시내에서 PCE 소속 노동 인권 변호사 3명, 법학도 1명, 사무실 관리자 1명을 살해하고 4명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테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는 계속되었다. 2월 16일, 이바루리는 모스크바 주재 스페인 당국에 스페인 귀국 허가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73] 2월 22일, 아직 불법 상태였던 PCE는 6월 15일로 예정된 총선 후보자 명단을 발표했고, 이바루리는 마드리드와 아스투리아스 두 선거구의 후보로 이름을 올려 당선을 확실시했다.[74]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도 스페인 정부는 4월 9일 PCE를 합법화했지만, 초기에는 이바루리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 PCE는 비자 유무와 관계없이 5월 13일에 이바루리가 마드리드에 도착하도록 준비했으나, 하루 전인 5월 12일 당국이 입장을 바꿔 비자를 발급했다.

1977년 5월 13일, 이바루리는 38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는 보리스 포노마레프, 미하일 수슬로프 등 소련 고위 인사들과 딸의 남편인 세르게예프 대령 등이 그녀를 환송했다.[76][77]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는 약 500명의 당원과 지지자들이 모여 그녀의 귀환을 환영했다.[76][78][79][80] 귀국 후 이바루리는 푸엔카랄의 등기소에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이시도라(Isidora)에서 돌로레스(Dolores)로 변경했다.[10][81]

이바루리는 곧바로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 5월 23일 빌바오에서 열린 첫 유세에는 3만에서 5만 명의 지지자들이 모였다.[26][82] 다음 날에는 아빌레스에서 연설했으며,[83][26] 이후 사마 데 랑그레오,[86][87] 라 펠게라,[88] 오비에도[89][90] 등 아스투리아스 지역을 중심으로 유세를 이어갔다. 당시 한 목격자는 도시가 붉은 깃발로 물들고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으며, 이바루리의 연설 시 분위기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고 회상했다.[84]

6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이바루리는 아스투리아스 선거구(당시 오비에도 선거구)에서 PCE 후보로 출마하여 60,297표(득표율 10.5%)를 얻어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PSOE가 31.8%로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구 독재 정당인 팔랑헤 에스파뇰라는 0.46%의 미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92][93][94]

7월 13일, 이바루리는 41년 만에 스페인 의회(코르테스)에 복귀했으며, 개회 세션에서 최고령 의원으로서 부의장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26][95][96] 7월 22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의회를 개원했을 때, 그녀는 다른 의원들과 함께 기립 박수에 참여했지만 자리에 앉아 있었다.[98] 의회 등원 중 팔랑헤주의자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99]

8월 4일, 그녀와 오랫동안 별거했던 남편 훌리안 루이스가 바라칼도에서 사망했고, 이바루리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4] 건강 악화로 귀국 후 첫 9개월 동안 세 차례 입원했으며,[101] 고령과 건강 문제로 인해 지역 PCE 지부에서 은퇴 권유도 있었으나,[100] 중앙위원회는 그녀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임기를 마치도록 했다.[102] 1978년 10월 31일, 그녀는 새로운 스페인 헌법에 찬성 투표를 했다.[103] 1979년 1월, 의회가 해산되고 3월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84세의 이바루리는 더 이상 출마하지 않았다. 1981년 2월 23일 파시스트 군부 쿠데타 시도 당시에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104]

이후 이바루리는 주로 PCE의 명예 의장으로서 활동하며 페미니스트 집회,[105] 정치 모임,[106] 당 회의 참석[107][108][109] 등의 활동을 이어갔고, 여름에는 소련에서 휴가를 보냈다.[110] 1985년 그녀의 90번째 생일에는 국제 여단 생존자들이 참석했으며, PCE는 마드리드에서 15,000~20,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기념행사를 열었다.[111][112] 1987년에는 연금이 없어 의회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매달 150000ESP (당시 약 1250USD)를 지급받았다.[113][114]

1989년 9월, 심각한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잠시 회복했으나,[115] 11월에 재발하여 11월 12일, 93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7][116][117]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경의를 표했으며,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유고슬라비아, 중국 대사 등 외교 사절단과 마드리드 시장도 조문했다.[118] 콜론 광장에서 라파엘 알베르티와 PCE 사무총장 훌리오 앙기타의 추도 연설 후,[119] 그녀의 유해는 알무데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무덤 근처에 자리 잡았다. 장례식에 참석한 군중들은 그녀의 유명한 구호인 "¡No pasarán!"(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을 외쳤다.[79][120] 일부 지역에서는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다.[121]

5. 유산과 평가



호다르,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세라노 카리엘의 이바루리 흉상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예술가 아서 둘리에게 영감을 주었다.[122] 둘리는 1974년 스코틀랜드 국제여단 협회로부터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정권에 맞서 공화파에 합류했던 국제여단의 영국인 의용병 2,100명을 기리는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다. 이 기념물에는 분쟁 중 사망한 534명의 의용병에게 헌정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에는 기념물이 위치한 글래스고 출신 65명도 포함된다.[123]

이 동상은 노조원과 노동 운동 지지자들의 모금으로 자금을 마련했다.[124] 하지만 모금된 3000GBP는 청동으로 동상을 제작하려던 예술가의 계획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대신 고철을 용접하고 유리 섬유로 덮어 제작되었다. 완성된 기념물은 긴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벌린 채 팔을 들고 서 있는 이바루리를 형상화한 여성상이다.[124] 받침대에는 둘리가 이바루리의 유명한 슬로건인 "무릎을 꿇고 영원히 사는 것보다 발로 서서 죽는 것이 낫다"를 새겼다. 이 문구는 멕시코 혁명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처음 사용했으나, 1934년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광부 파업 당시 이바루리가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B등급으로 지정된 이 동상은 상태가 심하게 악화되어 대중과 선출직 공무원, 노조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25] 2010년 4월부터 8월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고, 같은 해 8월 23일에는 시의회 대표 베일리 고든 매티슨과 스코틀랜드 노조 회의 사무총장 그레이엄 스미스가 참석한 가운데 재헌정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97세였던 생존 국제여단 참전용사 토마스 와터스도 함께했다. 와터스는 스페인 전선에서 부상당한 병사와 전 세계 의용병을 돕기 위해 활동했던 스코틀랜드 구급차 부대 소속이었다.

한편, 이바루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2017년 2월 바스크 지방 인민당은 그녀가 "스페인 내전에서 끔찍한 역할"을 했고 스탈린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이유로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의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126]

이바루리는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 브라질 펑크 록 밴드 블라인드 피그스는 2002년 앨범 ''블라인드 피그스''에 이바루리에 관한 영어 곡을 수록했다.[127]
  • 앤서니 파월의 소설 ''카사노바의 중국 식당''에서는 등장인물 노라와 엘레노어가 벽난로 선반에 라 파시오나리아의 사진을 걸어 놓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엘 소르도의 부대원들이 프랑코 지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 이바루리가 아들을 소련으로 보낸 동기에 대해 논쟁한다.
  • 글래스고 기반 퓨전 밴드 이날은 2017년 앨범 ''INYAL''에 "파시오나리아"라는 제목의 이바루리 헌정 기악곡을 수록했다.[128]
  • 미국 조각가 조 데이비슨은 1938년 마드리드에서 이바루리의 초상 흉상을 제작했으며, 자서전 ''Between Sittings: An Informal Autobiography''에서 제작 과정을 묘사했다.[129]
  • 2012년, 러시아 시위 펑크 밴드 푸시 라이엇의 멤버 나데즈다 톨로콘니코바는 재판 중 ¡No pasarán!es 문구와 주먹을 쥔 이미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어 이바루리의 저항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130]

6. 저서


  • ''돌로레스 이바루리: 연설 및 기사 1936–1938'', 뉴욕, 1938.
  • ''El único camino|엘 우니코 카미노spa'', 모스크바, 1963.
  • ''돌로레스 이바루리 회고록, 파시오나리아: 투쟁과 삶'', 바르셀로나, 1985.
  • ''그들은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라 파시오나리아의 자서전'', 뉴욕, 1966.
  • ''파시오나리아의 회고록, 1939–1977: 나에겐 스페인이 부족했다'', 바르셀로나, 1984.
  • ''저들을 통과시키지 마라! 스페인 내전의 배경'' 쿠보 아야 번역, 기노쿠니야 서점, 1970년
  • * 신판 ''저들을 통과시키지 마라! “정열의 꽃”의 반생'' 동시대사, 1982년
  • 책임 편집 ''스페인에서의 전쟁과 혁명'' 전2권, 아오키 서점,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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